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세/정치사/중기/중부유럽 일대 (문단 편집) ==== 11세기 ==== 밀레니엄이 될때까지 [[오토 3세]]는 로마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헝가리 대공국]]의 대공 [[이슈트반 1세|이슈트반]]이 로마 교회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는 것에 대해 찬성하여 헝가리하고도 우호관계를 맺는 등 다양한 활동에 매진했으나 1001년 로마 인근의 경쟁 도시 티볼리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그러나 오토 3세가 강력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로마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평화협상이 시도되긴 했지만 오토는 로마 바깥으로 피신해야 했고, 북쪽의 도시 치비타 카스텔라나에 머물면서 섭정으로 독일에 남겨둔 육촌 형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3세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1002년 1월 24일 갑작스런 고열에 시달리다 서거했다. 한편 오토 3세가 죽었다는 소식에 이브레아 백작이자 카롤링거 왕조의 외손이며 베렝가리오 2세의 조카 손자인 아르두이노 디브레아가 2월 15일 이탈리아 국왕을 자처했다. 나중에는 밀라노 주교 아르눌프는 그를 황제라 선언하였고 롬바르디아의 귀족들 또한 그를 카이사르로 불렸다. 그의 뒤는 독일에 남아 섭정으로 독일 지역을 통치하던 육촌 형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3세가 오토 가문의 종주가 되었다. 오토 3세의 운구 행렬이 알프스를 넘어 바이에른에 도착했을 때 하인리히 3세는 독일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선 제국회의에서 귀족들의 표를 얻고, 또한 권위를 증명하는 보물이 필요했다. 하인리히 3세는 행렬에 속한 쾰른 대주교 헤리베르트에게 오토 3세의 보물 중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고 알려진 [[롱기누스의 창|성창]]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귀족들에게 자신을 선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거절당했다. 방법을 바꾼 하인리히 2세는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를 회유해 독일 국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고 대관식을 거행했다. 왕가의 보물인 성창과 다른 징표들도 손에 넣었다. 이어 작센 공작 베른하르트 1세에게 통치권 보장을 약속하고 지지를 얻어냈다. 빌리기스 대주교에게 자신의 부인 쿠니군데를 독일 왕비로 인정하는 대관식을 치러달라고 부탁해 성사시켰다. 이런 식으로 독일 전역을 다니며 귀족들을 포섭한 하인리히 2세는 오토 대제의 손녀와 결혼해 적통임을 주장하는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나머지 경쟁자들도 물리쳐 마침내 독일 국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하인리히 2세는 육촌 동생인 오토 3세와 달리 로마 제국 복구보다는 프랑크 왕국 복구가 현실적이라고 여겼고, 이를 과업으로 삼았다. 그는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했으며 선교사들이 동유럽의 슬라브인들에게 전도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도 했다. 또한 귀족 세력을 억눌렸는데, 그의 전임자 [[오토 2세]]와 오토 3세 때처럼, 제국의 다양한 독일 공작들은 하인리히 2세로부터 점점 더 독립적이 되면서.지역별로 독자적인 정체성이 발달하기 시작했다.알프스 산맥 남쪽 이탈리아에서도 다양한 지역 영주들이 독립했다. 점점 제국의 영지들은 제국의 일부분이 아닌 각각의 공작 가문의 개인 소유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제후들에 대한 하인리히 2세의 정책은 황실의 지배력을 회복하기 위해 공작들 내의 이러한 가족 구조를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하인리히 2세는 다른 전대 왕들과 마찬가지로 공작들에 대한 그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회와의 연계에 의존했다. 하지만, 오토 1세와 오토 2세 치하와는 달리, 다양한 독일 공작들은 더 이상 하인리히 2세와 긴밀한 혈연 관계에 얽매이지 않았다. 프랑켄 공국과 작센 공국이 제국의 핵심 지지층을 형성한 반면, 슈바벤 공국과 바이에른 공국은 점점 더 반항적이 되었다. 그의 전임자들과 달리, 하인리히 2세는 그의 권위에 반기를 든 공작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것은 세속적인 귀족들과의 급격한 갈등을 야기했고, 이것은 하인리히 2세가 제국의 통치에서 성직자들이 누렸던 지위를 강화하도록 강요했다. 하인리히 2세가 통치 첫 10년 동안 그의 통치에 반기를 든 수많은 귀족 반란에서 살아남은 것은 성직자들의 지지를 통해서였다. 심지어 그의 처남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5세와 모젤 백작 프리드리히와 같은 그의 친척들도 반란을 일으켰다.그 결과 하인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작과 슈바벤 공작의 내부 권력 구조를 체계적으로 축소했다. 한편 독일왕으로 선출된 직후 그는 보헤미아의 자칭타칭 공작이었던 블라디보이에게 정식으로 작위를 내리게 되었고, 이로써 보헤미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통 공작이 다스리는 정식 공국으로서 제국에 편입되었는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사실은 블라디보이는 프르셰미슬 가문 소속이 아니라 계승 분쟁 중에 폴란드 왕국의 지원을 받아 보헤미아의 지배자가 된 피아스트 왕조 소속으로 추정되는 폴란드 계통의 인물로 추후 폴란드 영지와의 분쟁에서 아군으로 포섭하기 위한 목적이 다분했다. 이후 선거 당시 자신의 정적을 지원한 [[폴란드 영지]]을 공격했다. 그러다가 아르두이노의 반대 세력의 요청을 받았지만 이때까지 폴란드 영지를 통치하던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와의 산발적 분쟁에 집중해야 했기에 이탈리아 문제에 신경쓰지 못했다. 1003년 볼레스와프 1세가 보헤미아, 모라바, 슬로바키아를 복속시키면서 하인리히 2세는 동쪽의 일에 더 집중해야 했다. 그는 당시 현재의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의 남동쪽과 오늘날의 브란덴부르크 북쪽에 거주했던 슬라브계 루티젠족과 군사동맹을 맺어 볼레스와프 1세와 전쟁을 이어나갔고, 이후 볼레스와프 1세를 패배시키자 곧 이탈리아에 간섭,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침공하였다. 아르두이노는 하인리히 2세가 보낸 독일 군대를 패퇴시켰고, 하인리히 2세의 명을 받고 온 케른텐의 오토 1세는 소극적으로 전투를 지휘하였다. 하인리히 2세는 직접 출병했고, 아르두이노는 아디제 계곡에서 하인리히의 군사를 가로막았지만 하인리히는 바르수가나를 거쳐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하인리히 2세의 출현에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혼비백산하여 군사를 이끌고 달아났고, 아르두이노는 이브레아로 퇴각해야 했다. 1004년 초, 독일 왕 하인리히 2세는 아르두이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자신이 정당한 이탈리아의 왕이라 주장했다. 1004년 3월 하인리히 2세는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 북부로 와 트렌토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과 그 후계자인 독일 왕국에 대한 이탈리아의 귀족들의 반발과 불만은 심했고, 하인리히 2세는 아르두이노를 굴복시키기 위해 이탈리아의 귀족들을 체포, 처단하였다. 그러나 아르두이노는 이탈리아의 지형을 이용해 하인리히 2세를 상대로 계속 전쟁을 벌였다. 치열한 싸움으로 독일의 군대는 이탈리아를 황폐화 시키고 베로나를 점령, 하인리히 2세는 일단 1004년 5월 15일 파비아에서 밀라노 대주교 아르눌프 2세에게 이탈리아의 왕관을 받고 왕위에 올랐다.그러나 교황 [[요한 18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인정받는 데는 실패했다. 게다가 독일 왕국의 통치를 거부한 파비아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하인리히 2세에게 즉시 도시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1004년 9월 아르두이노는 하인리히 2세의 군사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가 계속 저항하자 하인리히는 결국 아르두이노를 물리치르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폴란드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계속해야 했으므로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로 돌아온 이후 볼레스와프 1세의 플란드 영지의 이탈을 막기 위해 분주했으며 1005년까지 이어졌고, 하인리히 2세의 군대가 포츠난까지 진입하면서 결국 하인리히 2세에게 굴복하고 다시는 독일 왕국에 대항하지 않겠다는 포츠난 조약을 채결했다. 하지만 1007년 블레스와프는 다시 조약을 철회하고 독립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블레스와프의 폴란드 군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후령까지 진군했으며 바우첸까지 손에 넣었다.1010년이 돼서야 하인리히 2세는 반격을 시작했으나 1012년 새로이 선출된 교황 [[베네딕토 8세]]가 대립교황 그레고리우스 6세로 인한 위기로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탈리아로 떠나야 계획이 생겼고, 볼레스와프 또한 키예프 루스와의 분쟁이 생기면서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되면서 1013년 메르제부르크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하인리히 2세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남하할 때 북이탈리아 일대는 여전히 아르두이노가 이탈리아 국왕을 자처하고 있었다. 이에 하인리히 2세는 이탈리아 내 아르두이노파 제후국들을 토벌, 복종 서약을 받아내고 독일로 되돌아갔다. 그해 말 그는 군사 충돌을 피하고 하인리히 2세에게 조건부 항복을 제시했지만 거부당했다. 하인리히 2세는 1014년 2월 알프스를 넘어 2월 14일 로마 가서 대관식을 치뤗는데 이에 대해 [[동로마 제국]]의 [[바실리우스 2세]]의.반발을 불려왔다. 그러나 2월 21일과 22일 로마에서는 아르두이노 지지 귀족 및 반 독일 세력이 하인리히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지만 곧 진압당했고, 하인리히는 그해 4월부터 5월 한달 간 로마에 체류하였다. 1015년 아르두이노가 프루투아리아의 수도원에서 사망하면서 하인리히 2세는 이탈리아 내에서 온전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볼레스와프가 다시 평화조약을 깨면서 하인리히 2세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 볼레스와프 1세는 아들인 [[미에슈코 2세|미에슈코]]와 함께 독일 동부를 유린했지만 보헤미아 공작령을 이끌던 올드르지흐의 분투 등으로 인해 전쟁은 3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결국 폴란드가 우세한 상태에서 바우첸에서 폴란드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폴란드와의 전쟁이 한참일 때 하인리히 2세는 서쪽의 [[부르군트 왕국]]으로 눈을 돌렸다. 하인리히 2세의 모친 지젤은 부르군트 왕 루돌프 3세의 동생이엇는데 그에게 딸 세 명이 있었고, 전부 결혼은 해 자식을 남겼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상테였기에 하인리히 2세는 외숙에게 자신의 계승권을 인정해달라는 주장했다. 이미 부르군트 왕국의 국력으로 독일 왕국을 이기기 힘든 상태였기에 루돌프 3세는 조카의 계승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사루 조카 하인리히 2세, 혹은 그의 후계자에게 부르군트의 왕위를 넘기겠다는 조약을 채결하고 우선적으로 [[바젤]]을 양도했다. 1020년 동로마 제국과도 전쟁을 벌였는데 상술한 하인리히 2세의 황제 즉위에 바실리우스 2세가 반발한 것과 함께 이탈리아 남부 바리의 롬바르디아계 귀족인 멜루스가 노르만 용병들을 고용해 동로마 제국에게 반란을 일으키다가 반란이 진압당하자 교황령으로 망명했는데 이후 하인리히 2세로부터 아폴리아 공작을 받지만 몇일만에 죽었고, 이에 하인리히 2세는 마인츠와 뷔르츠부르크의 주교들과 회의 끝에 이탈리아 내륙으로 다시 확장하는 동로마 제국을 저지하기로 했다. 1022년 하인리히 2세는 대군을 이끌고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남부 이탈리아로 향했다.그는 카푸아 공국을 정복할 목적으로 쾰른 대주교 필그림에게 티레니아 해를 따라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전진시킬 것을 명했다. 이후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포포의 지휘 아래 더 작은 세 번째 군대는 아펜니노 산맥을 통과하여 하인리히 2세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트로이아 요새를 포위했다. 필그림 총대주교는 카푸아의 판둘프 4세를 생포하고 카푸아와 살레르노 공국으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아냈지만, 하인리히 2세의 세 군대는 트로이아를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동로마 제국군은 장기전을 강용햇고, 하인리히 2세는 역병으로 인해 군대에 큰 손실을 입은 채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하인리히 2세는 카푸아 공작을 처형할 뻔했지만 필그림의 간청으로 살려두는 대신에 하인리히 2세는 그를 쇠사슬로 묶어서 독일로 보내고 판둘프 5세를 카푸아의 공작로 임명했다.이 원정은 결국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024년 부활절 기간에 로마에 있었던 하인리히 2세는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밤베르크로 돌아오자마자 몸져누웠다.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북쪽의 괴팅엔에 마련된 왕궁에서후사도 없는 상태에서 사망하고 만다. 이에 오토 왕가가 단정되자 독일 내의 제후들을 다시 독일 왕을 선출해야 했다. 오토 가문의 여계쪽 친척들이 있긴 했지만 새로운 국왕을 선출하는 귀족회의에 어느 누구도 후보로 나서지 않았다. 오토 왕조와 대립 노선을 걷던 [[콘라트 2세]]가 귀족 세력을 결집시켰기 때문이다. 경쟁자는 오히려 같은 살리 가문에서 나왔다. 이름 또한 동일한 사촌 동생 콘라트였다. 그러나 어린 콘라트는 당시 결혼을 하지 않았다. 국왕으로 선출된다 하더라도 후사가 없으면 다시 한 번 권력 다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에 의장을 맡은 마인츠 대주교 아리보를 비롯해 대부분의 귀족은 이미 아들을 두었으며 성숙한 인품을 지닌 콘라트 2세의 편을 들었다. 그리하여 결국 서른넷의 젊은 국왕이 선출되었다. 국왕이 되긴 했지만 선거에서 패배한 사촌 동생뿐만 아니라 오토 왕조의 종말을 안타까워하는 각지 귀족들의 불만이 가라앉지 않았다. 심지어 1025년 의붓아들인 슈바벤 공작인 에른스트 2세가 반기를 들었고, 폴란드에서 볼레스와프가 폴란드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뤘다. 콘라트 2세는 정치계와 종교계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는데 이때 볼레스와프 1세가 죽고 미에슈코 2세가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추방시키자 둘 중 한 명이었던 오토의 독일 망명을 받아들였다. 1025년 6월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 대주교 아리베르토가 하인리히 2세 죽음 후 북이탈리아 귀족들 사이에서 신성 로마 제국에서 독립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정치적 혼란이 생기자 이를 종식시키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 콘라트 2세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1026년 2월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인 부르노를 섭정으로 임명한 후 마인츠 대주교 아라보와 쾰른 대주교 필그림과 함께 군대를 몰고 간 콘라트 2세는 이탈리아로 진군하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의붓아들을 굴복시킨 후 강제로 원정에 참여시켰고, 계속 이탈리아로 진군해 3월에 밀라노에 들어온 후 이탈리아 국왕 선출 회의에서도 아리보 대주교를 의장으로 앉혔고 계획대로 왕관을 얻어냈다. 또한 1028년에는 장남 하인리히 3세를 독일의 공동국왕으로 앉혀서 계승 체계를 확고히 했다. 두 번의 국왕 선출로 빚을 진 콘라트 2세는 아리보 대주교에게 보답 차원에서 마인츠 인근의 슈파이어에 당시로서는 유럽 최대 수준의 대성당 건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아리보 대주교가 국왕 부부의 결혼이 가문 계승법에 위반된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부인 기젤라는 왕비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에 콘라트 2세는 아리보 대신에 쾰른 대주교 필그림을 왕실의 종교 수장으로 내세웠고, 가문 계승법을 인정받아 왕비 즉위식도 순조롭게 치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오토 왕조에 이어 살리 왕조 때도 종교계 인물들이 교황의 지시보다는 국왕의 경제적 지원에 허리를 굽혔다. 이로써 훗날 ‘카노사의 굴욕’으로 대표되는 정치와 종교 간 서임권 투쟁의 불씨가 커졌다. 한편 슈바벤 공작령 내의 반란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카린시아 공작 콘라트와 알트도프 백작 벨프 2세가 슈바벤 지역의 반란을 주도했다. 섭정으로 임명한 부르노마저 반란군에게 패배하자 1026년 9월, 콘라트는 에른스트를 독일로 돌려보내 반란을 종식시키려했으나 에른스트는 다시 반란군에 가담했다. 반란군들은 폴란드 국왕 미에슈코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독일 국왕 겸 이탈리아 국왕에 오른 콘라트 2세는 1027년 3월 26일 교황 [[요한 19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받았다. 대관식은 7일 동안 계속되었고, 주변국의 군주들 직접 참여하거나 사절을 보냄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관할하에 놓인 지역은 더욱 늘어났다. 대관식을 마친 콘라트는 서둘러 슈바벤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독일로 돌아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법정을 열고 반란군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에른스트는 신하들의 수와 충절을 믿고 평화 제의를 거절하고 슈바벤의 백작들에게 반란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백작들은 어니스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황제에게 반항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거절했고, 백작들의 지원을 받게 될 수 없자 1027년 9월 9일 반란의 수괴들이 콘래트에게 항복하여 반란을 종식시켰다. 콘래트는 에른스트의 공작위를 박탈 작센의 기비첸슈타인 성에 감금했다. 했지만 이후 황후 기셀라의 탄원에 그를 풀어주었지만 이름뿐인 공작으로 만들어버렸다. 한편 하인리히 2세가 먼저 죽자 부르고뉴 국왕 루돌프 3세는 자신의 왕국이 독일 왕국에 병합되는 사태를 피한 것에 대해 안도하게 되었고, 자신의 외손자들 중 한명을 후계자로 내정하려 했다. 하지만 콘라트 2세는 자신이 모계쪽으로 하인리히 2세의 인척이기에 부르고뉴에 대한 계승권 또한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루돌프는 이를 반박한데다가 루돌프와 가족관계가 두터웠던 블루아 백작 오도 2세도 승계를 주장했다. 콘라트 2세는 1027년 8월 바젤 근처에서 하인리히 2세의 황후인 룩셈부르크의 쿠니군드의 중재하에.루돌프 3세를 만나 분쟁을 해결했다. 콘라드 2세가 헨리 2세와 같은 조건으로 루돌프가 사망하자 부르고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대가로 루돌프는 그의 왕국에 대한 독립된 통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028년 보헤미아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영토를 폴란드에 상실한 올디치는 상실된 영토를 회복하기를 원했고, 콘라트 2세 또한 폴란드를 다시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 있길 원한데다가 슈바벤 반란에 개입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기에 이를 좌시할 수 없었기에 동방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고, 1027년 자신의 대관식에 참석했던 잉글랜드와 덴마크의 국왕인 [[크누트 대왕|크누트]]에게 슐레스비히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하는 등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했기에 콘라드 2세는 보헤미아 공국을 지원하면서 폴란드를 공격했다. 1029년 보헤미아 공국이 폴란드군을 동부 땅에서 몰아냈던 것에 비해 독일군은 바우첸을 공격했으나 루티치 부족의 약속된 지원을 받지 못했고 원정은 실패했고, 폴란드와 동맹을 맺은 헝가리의 위협을 받고 콘라트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미에슈코 2세는 헝가리와 동맹을 맺고 다시 한번 작센을 침공했다.그러는 동안, 그의 남쪽 동맹은 바이에른을 공격했고 일시적으로 비엔나를 점령했다. 이에 콘라트 2세는 미에슈코 2세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조직하여 폴란드 왕에 대항하는 또 다른 원정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1031년 보헤미아 공국이 헝가리 왕국의 슬로바키아로 영토를 확장하려 했으나 이스트반 1세와 합의를 이룬 콘라트 2세의 계획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이에 올디치는 더 이상 콘라트 2세의 동방 원정에 협력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헝가리와의 동맹은 폴란드에게 압박이 되었고, 무엇보다 각각 [[키예프 루스]]에 망명 중이었던 이복동생 [[베즈프림]]이 폴란드오 돌아와 추종자들을 규합해 반란까지 일으키자 미에슈코 2세는 동생을 피해 헝가리로 망명하다가 거부당하자 보헤미아에 명명을 요청하다가 그에게 앙금이 있던 오디치 공작에게 투옥되었다. 1032년 베즈프림이 추종자들에게 살해되면서 폴란드의 왕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오갔으며 그 결과 폴란드는 공국으로 격하되었고, 영토 또한 분할되면서 다시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한편 9월에 루돌프 3세가 죽으면서 바젤에서의 조약대로 부르고뉴 왕국을 이어받은 아를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해 오늘날의 스위스 서부와 프랑스 동남부까지 손에 넣었다. 이로써 그는 오토 대제 때보다 더 넓은 영토를 획득했다. 부르고뉴는 완전한 제국 통치하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많은 자치권을 허용받았다. 콘라트는 즉위식 이후 아를 왕국의 내정에 않았지만 황제의 영향력과 존엄성을 제국의 이익으로 증대시켰다. 부르고뉴가 확보되면서 콘라드는 서부 알프스의 이탈리아 진출입로를 통제했고 외세의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었다 콘라트 2세는 원칙에 의거한 통치 체계를 구축했다. 독일 중부의 작센 지역에서 관습법을 성문화시켜 분란을 없앤 것과 더불어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에 위치한 자치도시들의 권리를 인정한 것이 그 대표적 예다. 1036년 즈음, 밀라노 대주교 아리베르토는 지역 귀족들과 연합해 자치도시의 권리를 억압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분명한 원칙을 고수했던 콘라트 2세는 자치도시의 시민과 하급 기사들로 이루어진 발바소레 계층의 권리를 옹호했다. 하급 기사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의 내란 진압과 동유럽 원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리베르토와 귀족들이 강력하게 저항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까지 내려가 아리베르토를 체포한 후 ‘하급 기사들도 영지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는 내용의 법령을 공포함으로써 이들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확보했다. 1038년에야 돌아와 아들 헨리를 아를 왕국의 미래 통치자로 공표했으며 이후 살레르노의 가이마르 4세가 1024년 감옥에서 석방한 카푸아 공작 판돌로 4세와 카푸아에 대한 분쟁에서 콘라드에게 재판할 것을 요청하자 콘라트 2세는 다시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미하일 4세]] 역시 같은 요청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콘라드는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와 아베사 지방으로 갔다. 그는 독일 출신의 리차르를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장으로 임명했고, 판두프에게 몬테 카시노에서 훔친 수도원 재산을 반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판돌프는 아내와 아들을 보내 평화를 요청하면서 금 300파운드(140㎏)와 자녀 2명을 인질로 내세웠다. 콘라트는 판두프의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판두프가 자신의 외딴 성인 산타가타 데 고티에 숨고 인질들 또한 탈출했다. 콘라드는 카푸아를 포위하고 정복하여 가이마르에게 카푸아 공작위를 수여하였다. 그는 또한 아베사를 노르만 모험가 레이놀프 드렝고트 휘하의 살레르노 군으로 인정했다. 1038년 독일로 되돌아오는 중 전염병을 만나 많은 병사가 죽는 중에도 콘라트 2세는 무사했지만 이듬해 병을 얻어 오늘날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지역에서 서거했다. 유해는 아직 건설 중이던 독일 슈파이어 대성당으로 이관되었다. 왕위는 아들 [[하인리히 3세]]가 이어받았다. 하인리히 3세는 즉위 첫해에 전국을 순방하며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고 반대파를 설득했다. 서부의 고지 로트링엔과 그 위의 저지 로트링엔을 순방한 후 작센과 튀링엔을 거쳐 남부의 바이에른과 슈바벤을 지나 독일 땅을 크게 한 바퀴 도는 경로를 완주했다. 이듬해, 그는 제국의 위협이 되는 해외 세력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시작했다. 우선 동쪽의 보헤미아를 공격했지만 매복에 당하는 바람에 승리를 놓쳤다. 그는 독일로 돌아와 군대를 재정비해 더 동쪽의 헝가리로 원정을 떠났고 이번에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후 이어진 몇 년간의 전투에서 그는 연달아 이겼다. 이로써 그는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를 복속시키고 독일의 경계선을 다뉴브강 너머로까지 확장시켰다. 이 경계선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분열될 때까지 1천 년간 유지되었다. 하인리히 3세는 전쟁으로 포획한 수많은 포로에게 가혹 행위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의 뜻에 따라 평화와 휴전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령을 전국으로 하달해 포로들을 대가 없이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1043년 10월에 시행된 이 조치를 기려서 ‘대사면의 날’이라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경건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같은 해 11월, 하인리히 3세는 아키텐 공작 기욤 5세의 딸 아녜스를 만나 혼인했다. 이 결혼 덕분에 그는 프랑스 동부 아를 왕국과 프랑스 서부 아키텐 공작령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아들 하인리히 4세도 얻었다. 이후 그는 동부의 헝가리, 서부의 로트링엔, 남부의 이탈리아 등 각 변경지를 다니며 내란을 진압했다. 1046년, 하인리히 3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즉위를 위해 로마로 향했다. 당시 로마에는 세 명의 교황이 있었다. 원래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9세]]는 성직자를 그만둘 계획이어서 교황직을 [[그레고리오 3세]]에게 넘겼고, 이에 반대한 [[실베스테르 3세]]가 진정한 교황을 자처했다. 교황청의 분열을 목격한 그는 로마 출신이 아닌 사람을 추대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민중에게 인기를 얻고 있던 밤베르크 주교 주이트거를 교황으로 지명해 [[클레멘스 2세]]로 탈바꿈시켰다. 클레멘스 2세는 즉위 다음 날인 1046년 성탄설에 하인리히 3세를 위해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로마의 문제는 해결된 듯했으나 이듬해 10월 클레멘스 2세가 서거하는 바람에 새로운 교황이 필요했다. 하인리히 3세는 알자스 주교 브룬을 교황 [[레오 9세]]로 지목했으나, 그는 교회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던 인물이었다. 황제가 임명한 각 지역의 대주교보다 더 큰 권력을 갖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해서 전쟁을 벌이다 포로로 잡혔는데, 그는 풀려난 이듬해에 병을 얻어 서거했다. 이후 선출된 빅토리우스 9세는 하인리히 3세를 보필하며 안정된 노선을 걸었다. 그 덕분에 독일 각지와 헝가리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교황청은 지속적으로 황제의 편을 들어 교권을 안정시키고 귀족들의 참여를 독려해주었다. 하인리히 3세는 국내 각지와 변경지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집권 내내 기나긴 여행을 반복해야 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독일 중부의 고슬라에 왕궁을 지었으나 항상 머문 것은 아니었다. 1056년에도 그는 동북쪽의 슬라브족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병을 얻어 10월 5일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을 [[하인리히 4세]]가 여섯 살 남짓에 즉위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하인리히 4세는 어머니 아녜스 황후가 섭정을 맡았다. 어린 시절에 그는 쾰른 대주교 안노 2세에게 교육을 받았다. 하인리히 4세의 인생은 각지의 반란과 종교계의 대립으로 점철되었다. 주된 원인은 어머니의 판단력 부족에서 시작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바이에른, 슈바벤, 케른텐 등 왕권 기반을 이루던 지역의 권력을 귀족들에게 나누어준 것이 화근이었다. 자치권을 얻은 귀족들은 어린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걸었다. 종교적으로는 아버지 때부터 조언자 역할을 해온 교황 [[빅토르 2세]]가 1057년 선종한 후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실수가 계속되었다. 로마 교황령측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배제하고 선출 절차를 개정했다. 아녜스 황후는 뒤늦게 개입을 시작했지만 기존 황제들이 지원해온 개혁파가 아닌 보수파와 손을 잡았다. 개혁파들이 선출한 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아닌, 반대편의 대립교황 호노리우스 2세를 지지한 것이다. 이마저도 적극적이지 않아 개혁파 교황의 우세가 계속되었다. 우왕좌왕하던 황후의 행보는 마침내 반란을 유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062년 쾰른 대주교 안노 2세가 하인리히 4세를 납치하고 황후의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결국 아녜스 황후는 섭정 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권력을 차지한 안노 2세는 개혁파 교황을 옹호했다. 이로써 로마와 독일 간의 알력이 해소된 듯했으나, 뒤이어 섭정을 시작한 브레멘 대주교 아달베르트가 사제와 주교 임명 과정에서 부패를 저지르자 다시금 종교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1065년 섭정에서 벗어나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혼란스러운 권력 쟁탈전에 휘둘리느라 그는 지식과 성품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즉흥적으로 내렸다가 갑자기 번복하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1069년에는 베르타 왕비와 이혼을 발표했다가 귀족과 주교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다시 취소하기도 했다. 귀족들에게 나누어준 영지에 왕궁을 짓고 그 소유권을 관리들에게 넘겼다가 소요가 발생하는 바람에 다시 철회하는 등 내분을 자초했다. 1073년 밀라노 대주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도 알력은 계속되었다. 성직자들의 부패에 반대하는 개혁파 주교들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허락을 받아 대주교를 새로 옹립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기를 들어 다른 대주교를 내세웠다. 그리고 이시기 라인 강 일대에 [[코뮌]] 운동이 시작되었다. 1075년 교황은 “왕이라 해도 평신도에 불과하므로 대주교와 수도원장 등 로마 가톨릭의 주요 직책을 직접 임명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라며 ‘서임권 논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처음 순순히 처분을 받아들였던 하인리히 4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밀라노 대주교 임명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레고리우스가 점잖게 경고하자 1076년 1월 1일 교황을 폐위시키기에 이르렀다. 화가 난 그레고리우스는 오히려 하인리히의 편에 선 주교들을 파문했고, 국왕에 대한 귀족들의 충성 서약까지 무효화했다. 주종관계에서 자유로워진 지역 귀족들은 새로운 국왕 선출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하인리히 4세는 이듬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논쟁을 결론 내기로 합의해놓고 곧바로 이탈리아로 비밀 원정을 떠났다. 그레고리우스의 교황 등극을 지원했던 투스카니 여후작 마틸데는 전쟁이 닥칠 것이라 생각하고 교황을 카노사 성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오히려 사죄를 청했다. 그는 추운 겨울날 성문 앞에서 맨발로 3일을 기다린 끝에 허락을 받아 교황을 만났고, 땅바닥에 엎드려 십자가 자세를 취했다. 이것이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다. 그레고리우스가 시간을 끈 것은 고압적인 태도로 괴롭히기 위해서였다기보다 하인리히 4세를 용서하는 것과 결별하는 것 중 어떤 것이 이득을 가져다줄지 판단이 늦었던 이유로 보인다. 이때부터 주교와 수도원장 서임권은 국왕에게서 교황으로 옮겨졌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은 교황에게 복종하는 관계로 굳어졌다. 그 덕분에 하인리히 4세를 따르던 주교들에 대한 파문 조치는 철회되었지만, 귀족들은 약속을 깨고 몰래 교황과 접촉한 것에 대해 분개했다. 결국 슈바벤 공작 루돌프가 1077년 대립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3년 동안 하인리히 4세와 루돌프는 독일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계속했다. 1080년 그레고리우스는 루돌프의 손을 들어주고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황권의 강화를 우려한 귀족들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폐위하고 라벤나 대주교 구이베르트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돌프가 사망하자, 기세가 높아진 하인리히 4세는 1081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직접 쳐들어갔다. 1084년까지 버티던 그레고리우스는 결국 도피했고, 클레멘스가 단독 교황이 되었다. 그 덕분에 하인리히 4세는 3월 31일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올랐다. 1087년 부인 베르타 황후가 서거하자, 그는 1089년 키에프 공국의 공주 유프락시아와 재혼했다. 유프락시아는 프락세디스 또는 아델하이트로도 불린다. 한편으로 정신을 바로 잡았는지 반란으로 황폐화된 제국을 재건하면서 귀족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시민과 하급 기사들의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하여 하급 기사들과 백성들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는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카노사 성의 주인 마틸데 여후작은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1089년 새로운 교황 [[우르바노 2세]]를 통해 바이에른 공작 벨프 5세와의 결혼을 성사시켰고, 하인리히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중에는 1087년 독일 공동 국왕으로 인정받은 하인리히 4세의 아들 콘라트 2세도 있었다. 콘라트 2세는 1093년 이탈리아 국왕으로 추대되었고, 결국 롬바르디아를 기반으로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인리히 4세는 수세에 몰렸지만 벨프 5세가 마틸데와 결별하고 자신을 찾아온 덕분에 1097년 전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듬해, 콘라트 2세를 대신해 동생 [[하인리히 5세|하인리히]]가 독일 공동 국왕으로 새로이 선출되었다. 1099년 우르바노 2세가 선종하고 새로 [[파스칼 2세]]가 선출되었는데, 그 역시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으로 다투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